사명을 찾아서 감사하며 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인생고의 불행이 자기 앞에 휘몰아칠 때 운명으로 맡기고 생을 저주하며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고난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 고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끼면서 성공적인 인생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서나 가혹한 운명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칠지라도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불행한자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맡겨 살도록 하지 않으시고 불행한 운명을 바꾸어 보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며, 배고픈 자에게 빵 주며, 슬픈 자를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가난 자에게 부요함을, 실패한 자들을 성공적인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의로운 사람으로, 쓸모없는 인간을 쓸모 있는 인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저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 세상의 방법과는 다른 차원에서 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는 부모를 잃은 대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소경대로, 그 환경과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자아의식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교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의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외모, 재능, 환경, 직업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평가 비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비교의식을 통하여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하여 회의에 빠지고, 불만스런 현실에서 반항하고 원망하며 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조의식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 절대로 나와 유사한 다른 존재는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나는 나로서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자각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며, 비로소 사명을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자신에게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 맹아의 기적을 낳은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7살에 맹인이 되어 아무 쓸모없는 아이로 멸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집에서 쫓겨나 남의 집 처마 밑에 누워서 개들이 따스하게 해주는 체온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습니다. 정녕,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을 방문한 교회 여 전도사님으로부터 ‘네 부모는 너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너를 영접하시리라’(시 27:10)는 간곡한 위로의 말씀과 기도에 용기를 얻고 어린 그녀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쓸데없는 아이라 하는데, 이 쓸데없는 것이 살아서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은 내가 쓸모가 있으신가요?” 이렇게 기도할 때, 그녀의 마음속에 이런 응답이 왔습니다. ‘너는 눈이 안보여 네 눈이 쓸데없지만, 네 몸에 남아있는 것을 헤아려 보아라. 지금 너에게는 남은 것이 있으니 못 쓸 것은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쓸 수 있으니, 두 귀가 있고 코와 입이 있으며 손과 발이 있지 않느냐?’ 그때 그녀는 하나님께, “하나님, 이제 죽지 않고 살아서 오직 눈을 감은채로 열심히 일하겠나이다.” 하고 감사기도를 하였습니다. ‘입으로 주님을 증거하고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손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겠나이다.’ 라는 뜨거운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삶의 가치를 발견하였습니다. 과연 그녀는 할 일을 찾았고, 눈은 안보였으나 눈뜨고 보는 우리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양정신’ 여사입니다. 사람이 쓸 수 없다고 버린 인간 부스러기, 고장 난 인간, 앞 못 보는 한 소녀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깜짝 놀랄 일을 하셨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지금 양정신 여사는 대학교 강사로, 교회의 목사로, 글을 쓰는 문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엄청난 운명의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행복을 느끼며 감격스런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간에 주를 위하여 일하는 데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생의 의미를 찾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할 일을 찾는 백성, 할 일을 찾는 교회, 할 일을 찾는 목사, 할 일을 찾는 교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확신이나 재능이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오직 주님을 위하여 할 일이 무엇인가 찾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가장 먼저 터뜨린 기도가,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 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실망과 불행을 모르고 일생을 살아간 것은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의 할 일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로망 롤랑’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라, 그리고 죽으라.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들이여! 가라, 그리고 괴로워하라. 반드시 괴로움을 겪어야 할 그대들이여! 산다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산다는 것은 나의 할 바를 다하기 위해서이다.” 주어진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면 환경을 변화시키고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내게 주어진 운명을 운명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은 지극히 큰 축복이 된다.’ 고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삶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야 맙니다. 그러나 자기의 현실에서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은 삶 전체를 저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감사가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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