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실망에서 반동으로 나온 신 의존 의식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골똘히 생각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길을 걷노라고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은 벌컥 화를 내면서 “당신은 누구인데 앞도 보지 못하고 다니는 거요?” 하고 책망을 하더랍니다. 그때야 정신이 들어 멋쩍은 표정을 하면서 쇼펜하우어가 대답하기를 “글쎄올시다. 내가 누구이냐고요? 나도 방금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남들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 하느냐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 할 자기 자신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려서 내가 누구이냐 하는 것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혹은 자신 앞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을 아는 분야는 폭도 넓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만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모르는 것이 자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알게 되나 내 허물은 알기가 어려우며, 남의 자식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이 되나 내 자식에 대해서는 어렵습니다. 언제나 내 쪽은 어둡고 미상이 있고 불투명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기도 어렵지만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나아가서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거짓과 불의를 보더라도 타인에게 있는 것보다는 내안에 있는 것이 무서우리만큼 더 크고, 더 고질적이며 더 본질적입니다. 그러므로 실망 중에 가장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래도 무엇을 좀 할 수 있는 [나]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소라도 의지가 있고, 선이 있고, 진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대로 ‘전적 타락’입니다. 형편없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았으면 원망할 말이라도 있지만, 지금껏 나에게 속았으니 할 말도 없습니다. 정말 비참한 나의 모습입니다.

인도 사람들의 격언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개의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비유하기를 사람의 마음속에는 흰 개와 검은 개가 있어서, 늘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검은 개가 이겨서 육체가 좋아하고, 어느 날은 흰 개가 이겨서 영혼이 좋아 한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누가 싸우고 있습니까? 개가 있습니까? 늑대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우가 있습니까? 이 그치지 않는 싸움과 갈등과 모순 때문에 기형아처럼 돼버린 비참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두개의 얼굴을 그대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자기 속에서 원하는 선을 행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로마서 7장). 그러면서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의 실존 그대로를 고백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혼자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다가 자기 모습을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게는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이를 보건데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는 자기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제불능으로 보았습니다. 조금만 고삐를 늦추어주면 딴 짓을 하는 존재,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간사해지는 존재, 조금만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교만해지는 존재로 파악한 것입니다. 아주 몹쓸 자기 존재이기에 자신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으며, 나아가서는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까지 자기 존재를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몇 퍼센트나 믿고 있습니까? 믿을 만합니까? 쓸 만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내 일상의 실패의 원인이 어디 있나 를 생각해 봅시다. 사랑을 생각하면서도 미워하고, 화평을 원하면서도 분쟁하고, 의를 소원하면서도 불의에 살고, 진리를 그렇게도 사모하면서도 거짓으로 살아가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잘못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믿었던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지 말아야 할 존재였으며, 인정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실체를 몰랐다는 것이 바울의 소신입니다. 인간 실존이 아니라 자기 실존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미련 없이 자기를 비워 버리고 미련 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자기가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음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은 저 깊은 곳에 또 하나의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진실입니다. 결코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는 악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가 이것이 틈만 나면 들먹거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포기가 있었기에 삼가 조심하면서 하나님께만 희망을 갖고 철저히 신 의존적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바울을 바울 되게 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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